지난 칼럼에서는 OECD 2025 보고서를 중심으로 비대면진료의 국제적 동향과 프랑스의 ETAPES 제도화를 살펴보았다. 기술이 아니라 ‘정책의 정렬(alignment)’이 지속가능성을 결정한다는 OECD의 메시지는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번 글에서는 그 시선을 한국으로 돌려, 왜 우리는 기술을 갖고도 제도를 갖추지 못했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OECD는 2025년 보고서에서 한국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의료인과 환자의 이용은 확대되었으나, 제도적 통합은 제한적이다.” 라고.
이는 비대면 진료가 여전히 의료제도의 틀 안으로 편입되지 못한 채 주변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정책의 프레임이 충분히 정돈되지 못했고, 기술은 있지만 제도가 따라오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사실 OECD는 이미 몇 해 전 보고서(2020년)에서도 “비대면 진료의 만족도는 대체로 높지만, 만족도 만으로는 질과 효과를 평가할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만족은 쉽게 얻을 수 있지만, 지속 가능한
제도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뜻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우리나라의 EMR(전자의무기록) 도입 정착 과정을 떠올렸다.
사실 나는 EMR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도입 적용되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단순한 기술의 확산이 초점이 아니라, 의료기관 내부에 의료진이 직접 사용하는 시스템이었기에 진료, 예약, 청구가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었고, 그 덕분에 기술은 의료 안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왜 비대면 진료는 지금까지 EMR처럼 의료시스템 내부로 정착하지 못했을까.
물론 여러 제도적, 행정적 요인이 있겠지만, 애초에 설계 방식이 의료기관 중심으로 설계되지 못하였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의 비대면 진료는 환자가 플랫폼을 열어 의사를 선택하고, 의료기관은 호출되는 구조다. EMR이 의료기관 중심으로 구축된 것과는 정반대의 설계이다.)
올 여름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간 딸이 갑자기 눈에 염증이 생겼다. 안약이 필요해 급히 병원을 찾아야 했는데, 검색을 통해 가까운 원격진료가 가능한 의원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워크인(대면)과 원격진료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고, 예약부터 상담, 처방까지 모든 과정이 병원 시스템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의료가 ‘앱 바깥’이 아니라, 의료기관 안에서 작동하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경험은 나에게 이런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한국에서도 비대면 진료가 진정으로 의료의 일부가 되려면, ‘플랫폼 밖’이 아니라 ‘의료기관 안’으로
들어와야 하지 않을까? 의사들이 관리하고, 환자들이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 안에서 의료의 외연을 확장하고, 환자의 선택권을 넓히는 방식으로 작동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도 여전히 비대면 진료의 제도화를 논의하면서 다수의 세미나, 언론보도 기사 등에서는 환자의 만족도를 논한다. 환자가 원하니 제도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의료의 안전성, 유효성, 경제성을 고려하여 정책이 설계되는 현재의 우리나라 보험정책과 맞지 않다. 그렇다고
만족도를 측정하지 말자, 논하지 말자는 얘기는 아니다. 정책을 설계할 때는 다양한 각도로 진단하고 평가하며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비대면 진료의 논의는 ‘기술을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의료제도 안으로 어떻게 정렬(alignment)시킬 것인가의 문제다. 정책의 역할은 기술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이 의료 안에서 신뢰와 책임의 구조 속에 작동하도록 길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EMR이 그랬던 것처럼, 비대면 진료 역시 의료기관 안에서 진료의 연속성을 지키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의료진이 주체가 되고, 환자가 신뢰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때 비대면 진료는 의료를 대체하는 기술이 아니라 의료를 확장하는 제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책이란 결국 기술을 제도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다. 그 언어가 정렬될 때, 비대면 진료는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의료의 한 축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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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선 한국보건의료연구원 부연구위원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노인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