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의료정책 실패의 근원은 거버넌스에 있다: 탁상행정과 집단사고의 덫
  • 지난 10월 13일, 유튜브 채널 언더스탠딩(UNDERSTANDING)에서 공개된 「한국 의료제도는 중국보다 못하다」 영상을 시청했다.

    영상은 수도권 쏠림과 필수의료 기피 현상을 ‘시장 실패’가 아닌 ‘정책 설계와 집행의 실패’로 진단했다.

    나는 그 주장에 깊이 공감했으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이 되었다.

    내가 경험한 우리나라의 보건의료정책은 오랫동안 소수의 전문가 집단에 의해 형성된 것들이었다. 이들은 정권이 바뀌어도 자리를 바꿔가며 동일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새로운 관점이나 현장의 목소리는 좀처럼 진입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진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소수의 전문가)의 목소리를 뒷받침해주는 ‘연구자’로만 활용될 뿐이었다.

    이런 구조는 사회심리학자 어빙 제니스(Irving Janis, 1972)가 말한 ‘집단사고(Groupthink)’와 유사하다. 이는 소수의 의사결정자들이 비판적 사고보다 내부 합의에 집중하면서 결국 비현실적이고 현장을 모르는 정책이 반복적으로 생산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런 구조는 정책학에서 말하는 ‘정책독점(Policy Monopoly)’ 개념처럼, 권력과 정보가 일부 전문가와 관료에게 집중되어 다양한 의견이 구조적으로 배제되는 현상으로도 설명된다.

    한국 의료를 걱정하는 많은 전문가들은 상급종합병원으로 경증환자가 몰리고 지방의 중소병원이 무너지는 현실을 우려한다. 그들은 단순한 의대 정원 확대나 지역의대 신설이 아니라, 현장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겨있는 정책이 필요하며, 예를 들면 상급병원의 경증 진료 제한, 교수·전문의의 지역 순환 근무, 의료전달체계의 복원과 지역 신뢰 회복이 근본적 해법이라고 주장한다.

    더 근본적으로는, 거시적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중장기 로드맵이 절실히 필요함을 주장한다. 이런 정책방향과 논의의 필요성에 나도 전적으로 공감한다.

    다만, 중장기 로드맵은 단순한 계획이 아니라, 국가의 의료정책을 일관된 방향 속에서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구조적 약속이다.

    이를 위해서는 단기적 성과를 넘어서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과학적 근거 위에서 심층적으로 탐구하며,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지금과 같은 복잡한 시대에는, 단 한두 명의 뛰어난 전문가가 국가의 의료정책을 설계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독립적이고 지속 가능한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이 거버넌스는 정부 부처나 일시적 자문기구를 넘어, 다양한 전문가와 현장가가 함께 참여해 정책을 장기적으로 설계하고 점검할 수 있는 구조여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중장기 로드맵이 만들어질 수 있다.

    보건의료정책 연구를 하며 나는 종종 이렇게 생각해 왔다.

    “우리는 너무 빨리 결정하고, 너무 빨리 잊는 나라가 아닐까.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는 나라, 숙의의 구조가 없는 거버넌스.”

    그 결과 정책은 다양성을 잃고, 정책가들은 기다려주지 않으며, 탐구의 시간과 숙의의 과정은 점점 사라져 갔다.

    이것이 바로 한국 의료정책 실패의 본질이 아닐까. 그리고 그 민낯에는 여전히 학벌 중심의 관료문화, 학연·지연에 얽힌 폐쇄적 의사결정 구조가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책의 혁신은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정책을 만드는 구조, 즉 거버넌스를 바꾸는 데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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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선 한국보건의료연구원 부연구위원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노인학과 초빙교수

  • 글쓴날 : [25-10-23 10:59]
    • 정선영 기자[annsy031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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